언제였더라. 처음 죽음을 가까이서 느낀 그 때가. 아마, 대학교 3학년 기말고사를 보고 있었던 시점이었을거다.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바로 맞이한 3개월간의 방학동안, 나는 참 많이 방황했던 것 같다. 많이 우울해했었고, 삶의 이유도 찾지 못했으며, 즐거움과 웃음을 잃어버렸었다. 비단 할머니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여러가지 일이 맞물려서 참 힘든 시기를 보냈다.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스트레스라고 한다. 그런 엄청난 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죽음에 초연할까, 아니면 맞댈때마다 항상 슬프고 복잡한 마음일까.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켰던 다이코는 오케스트라가 해체되자, 첼로를 접고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연히 본 직원모집 광고로 염습사라는 직업을 가진다. 죽음에 닿은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만들어주고 보내주는 일을 정말로 정성스럽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염습사라는 직업에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다른 여자와 함께 집을 나가 30년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주며 마음안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털어낸다.
 
 우리는 끝을 끝이라고 한다.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의 다른 말일 뿐. 죽음도 그러하다. 죽음은 다른 세계로 가는 이 세상의 마지막 문일뿐. 이 세상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걸 알기에 사람들은 슬퍼하는거다. 죽음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몰라서, 죽음 뒤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몰라서, '무지'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슬퍼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기에, 인간이기에, 아직은 마냥 죽음이 두렵고, 먹먹하고 슬프다. 또한 아무리 생각해보고 생각해봐도 죽음의 대한 의미는 아직 자음 하나도 쓰지 못할 정도로 막막하게 다가온다. 그 숱한 날의 방황 속에서 내가 알수 있었던 한가지는 바로 '삶'이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어찌보면 삶의 반대말은 죽음일지도 모르는데, 그 속에서 삶을 알다니 말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 혼란과 방황 속에서 내가 깨달았던 것은 삶이었다. 그 전과 다른게 있다면 수식어로 '가치있는'과 '후회 없는'이 붙은 것 뿐이다.
 
 주어진 인생을 자신의 생각대로, 그리고 매사 즐겁게만 살아가기는 이 세상이 참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죽는 그날 내 인생을 돌아볼 때, 후회스럽지 않고, 가치 있었다고 자평할 수 있다면, 그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은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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